2․28 학생의거는 불의와 부정에 감연(敢然)히 맞섬으로써, 우리 대고인의 패기와 박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장거(壯擧)였다. 그리고 이 의거는 그 뒤의 3․15 마산의거와 4․19 혁명으로 곧바로 이어짐으로써 드디어는 민주혁명의 위업을 달성하게 한 서곡이요 기폭제가 되었다는 데서 그 커다란 의의를 찾을 수 있다.
2․28민주의거는 1960년 자유당 정권의 독재와 부패, 그리고 실정으로 인해, 국민들이 극심한 빈곤과 인권유린에 허덕이는 상황에서 일어난 민주적인 저항운동이었다. 당시 자유당정권은 영구집권을 위한 억지 개헌을 하는가 하면, 3월 15일 정부통령선거를 앞두고 민심의 이반을 뻔히 알면서도 부정선거로 집권연장을 기도하고 있었다. 선거가 다가오자 자유당정권의 온갖 악행이 자행되는 가운데 언론과 야당에 대한 탄압은 물론이고, 막걸리와 고무신으로 매표공작을 벌리는가 하면, 여당후보의 정치집회에는 청중을 강제 동원하면서 야당후보의 연설회에는 사람이 모이는 것을 극력 방해하고 나섰다.
이처럼 자유당의 장기집권을 위한 음모가 진행되는 가운데 정부통령 선거운동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2월 28일 일요일, 대구시내 수성천변에서 야당의 부통령 후보인 장면 박사의 선거연설회가 계획되었다. 당시 국민들 사이에는 자유당정권의 악정을 심판해야 한다는 소리 없는 여론이 전국을 메아리치고 있었다. 대통령선거에는 야당후보인 조병옥 후보가 부각되고 있었으나, 불행하게도 조박사가 급서함에 따라 부통령 후보인 장면박사가 국민들의 모든 여망을 짊어지게 된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일요일인 2월 28일 수성천 변의 야당유세는 대구시민들은 물론, 전국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자유당정권의 온갖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많은 인파가 몰릴 것으로 예상되고 있었다.
그러자 선거의 패배를 예감한 자유당정권은 고교생들마저 유세장으로 몰릴 것을 우려한 나머지 대구시내 공립고등학교에 일요일 등교를 지시했고, 이에 따라 각 학교는 임시시험을 친다거나, 단체 영화관람, 토끼사냥 등을 핑계로 등교를 종용하였다. 이러한 자유당정권의 간계를 알아차린 학생들은 치를 떨었고, 학교에 모인 학생들은 교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경북고교를 선두로 마침내 학교를 뛰쳐나왔다. 거리로 나온 학생들은 자유당의 불의와 부정을 규탄하는 집회를 열어 궐기했고, 이들 시위대는 당시 인구가 밀집했던 중앙통을 거쳐 경북도청과 대구시청, 자유당 경북도당사, 경북도지사관사 등을 돌며 자유당 정권의 악행을 규탄했다.
이로 인해 숱한 학생들이 경찰에 연행되어 고통을 받았으며, 교사들도 모진 책임추궁을 받았다.

<2·28당시 경북고생들과 대구고생들이 경찰에 검거되어 끌려가고 있는 모습>
그러나 당초 엄벌을 계획했던 자유당정권은 국민들의 분노가 두려워 학생들에 대한 처벌을 완화할 수밖에 없었고, 움츠렸던 언론도 마침내 학생들의 2․28민주의거를 보도함으로써 전국의 학생들이 잇따라 시위와 궐기의 대열에 나섰다. 어른들조차 아무도 나서지 못했고, 입을 다물었던 공포분위기 속에 어린 학생들이 처음으로 자발적인 의사표시를 한 것이었다. 당시 대구시민들도 도피학생들을 숨겨주는 등 뜨거운 성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뒤 2․28민주의거는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져나갔으며, 후일 3·15마산의거와 4·19혁명, 그리고 4․26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로 이어져 마침내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2․28 학생민주의거는 가난과 독재, 불의와 부정에 항거한 대구시민정신의 표출이었고 해방과 더불어 도입된 서양식 민주주의를 한국적 민주주의로 전환하는 일대사건이었다. 뿐만 아니라 동양에서는 최초로 시민에 의해 민주화를 이룩한 4․19 역시 대구의 어린 학생들이 지핀 위대한 불씨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 청사에 길이 보전되고 있다. 이제 2․28의거는 국채보상운동과 함께 대구정신의 양대 지주가 되고 있다. 그 정신만은 대구가 있는 한 보존되어야 할 것이다.
< 大邱高 50 年史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