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정의 외치며 민족혼 일깨워
대구학생들, 민주운동 첫발 내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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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전, 1960년 2월28일. 한국 근대사에서 큰 획을 긋는 역사적 사건이 이 땅의 우리 모두를 놀라게 한다. 민주운동의 첫 깃발이 대구에서 펄럭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960년 2월 27일 밤. 어둠은 달구벌에 소리도 없이 내려앉고 있었다. 28일을 기다리는 바람도 숨을 죽이고 있었다. 민주운동의 젊은 영웅들이 분연히 일어섰고, 달렸고, 민주를 소리쳤다. 이들의 함성은 바람이 되었고, 그 바람은 또 다른 바람과 만나 `민주의 깃발’을더 높이 더 힘차게 흔들었다. 이 땅에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그들은 역사의 중심에서 심장이 쿵쿵 뛰는소리를 들으면서 달구벌을, 대구의 중심가를 달리고 있었고, 지금도 그들 젊은 영웅들은 달리고 있다.
1960년 2월 28일 대구에서 고등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가 부당한 일요일의 등교지시에 항의하며 시위를 벌였다. 일요일의 강제적 등교지시는 3·15선거(제4대 대통령 선거와 제5대 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대구에서 민주당 부통령 후보(장면)의 유세가 있었기에 선거유세 방해의 한 방편으로 내려졌다. 항의시위는 시민들의 박수와 응원을 받으며 시민운동의 양상으로 전개되었고, 그 뒤 3·15, 4·19로 이어지는 2·28은 고등학생들의 단순한 감정 분출이 아니라 시대의식을 반영한 민주운동의 시작으로 인식되었다. 결국 2·28은 한국사회에서 민주주의 발전의 출발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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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8의 발발원인은 해방 후 한국사회 형성기의 모순된 구조에서 문제점을 찾아야 할 것이다. 즉 일본 식민통치 잔재의 미청산, 분단국가의 형성, 대미의존적 경제구조의 창출 등과 같은 구조적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1960년대로 접어들자, 이승만 독재정권(자유당)의 무능과 부정부패가 더욱 더 심화되었고, 사회변혁에 대한 강렬한 국민적 정서가 대구지역사회의 특수성과 결부되자 2·28이 발생한 것이다.(윤순갑, “2·28 민주운동의 배경”, 『2·28 민주운동사』(2·28민주의거40주년기념사업회, 2000) 참조.)
3·15선거를 앞두고 선거전이 최고조에 달했던 1960년 2월 28일 민주당의 부통령 후보는 4년 전의 선거에서 자유당의 갖은 방해에도 불구하고 그의 승리를 결정지어준 대구에서 선거유세를 가지게 되었다.
이날 야당의 선거운동을 방해하기 위해 온갖 방해 책동을 준비한 자유당의 지시에 의해 선거강연에 학생들이 참관하지 못하도록 대구의 일부 중등학교에서는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을 강제로 등교시켰다. 전통적으로 야당도시로 이름난 대구에서 야당인 민주당의 선거유세를 방해하기 위한 자유당 정권의 일요일 등교지시는 고등학생들의 항거를 불러왔고, 이 시위가 발단이 되어 부정과 부패가 만연한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이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대구는 정치, 군사상의 요충지로서 중요한 역사적 사명을 수행해왔고, 영남지방의 빛나는 정신사의 중심지로서의 역할도 충실히 이행하였다. 신라의 화랑도와 고려시대의 대몽고 저항정신은 임진왜란의 의병정신으로 발현되었고, 이는 구한말 일본의 강점기 때 항일의병과 국채보상운동으로 계승되었고, 해방 후에는 미군정에 항거한 10·1 항쟁으로 계승되어 왔다. 사실 대구시민의 의식구조 속에 전근대적인 폐쇄주의, 권위주의, 보수주의 등이 농후하게 남아 있다는 주장이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언급한 역사적 저항의식은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와 무능과 선거부정에 대항하여 2·28로 계승되었다.
1960년 2월 28일 그날로 돌아간다. 그날 대구의 어리고 순수했던 고등학생들은 학교측의 부당한 일요일 등교지시에 항의하며 교문을 뛰쳐나갔다. 그리고 그들은 자유와 정의의 회복을 외치며 자유당 정권의 독재에 무기력하게 침묵하는 민족혼을 일깨우고자 했다.
2·28의 발단은 학생들에게 일요등교가 통보된 2월 25일부터였다. 이날 경북고등학교에서는 종례 시간에 “이번 일요일에는 빠짐없이 학교에 나와야 한다. 28일 오후 1시엔 여하한 사정이 있더라도 등교하라”는 학교당국의 통지가 있었다. “예정된 시간표가 중학생 입시관계로 일부 변경되어 28일은 일요일이지만 시험을 실시하겠으니 모두 불만 없이 따르도록 하라”는 내용이었다. 당초 3월 3일 시작한다고 공표 되었던 학기말 시험일정을 갑자기 변경하고,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등교하라는 지시에 학생들은 이를 매우 이상하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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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년 4월 1일 경북도청사 이전 전의 경북도청과 경북경찰국 건물 (현 경상감영공원부지) 사진=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제공 |
27일에는 권력을 업은 위세등등한 자유당의 정치강연회가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날 밤은 결연한 밤이었다. 고등학생이라는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진지한 자세로 이 나라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논하고 과감한 결단을 내려, 궐기를 결심했지만 은근히 걱정되고 주저하는 마음이 생기기도 했을 것이다. 당시 지역의 한 신문은 결정적인 그날 밤의 광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2월 27일 밤, 당시 경북고등학교 운영위원회 부위원장 이대우 군 집 냉돌방에는 각 학교 간부들이 문풍지로 새나가지 않을 낮은 소리로 무언가 머리를 마주 대고 회의를 하고 있었다. 2·28데모의 진통의 소리가 밤이 깊어감과 함께 더 높아 가고 있었다. 자정을 넘어선 구수회의. 「2·28데모의 산실」에서는 어둡고 괴로운 일당독재에 항거하는 학생데모의 결의를 마침내 다지고, 어느 아침보다 더 선명히 밝은 아침햇살을 받았다.
27일 밤 3개 고등학생 대표자의 구수회합에서는 자유당의 정치악에 정면으로 도전하자는 28일의 데모계획이 만들어졌다. “하자!”는 측은 학도의 명분을 들었다. “12년 이승만 일당독재의 민주공화국은 정치악에 부패되어 조국의 명맥이 질식사의 선상에서 후들후들 떨리우고 있다.
이 이상 더 현실을 좌시하고 우리들만의 안온한 상아의 전당에 묻혀 오불관 할 수는 없다. 보다 역사의 사명을 떠맡은 청년의 기개를 다할 수 있는 3·1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받들어 독재자에 항거해 봉기하자”는 것이 주 논지였고, “못한다”라는 측은 “만약 항거데모를 했다간 우리는 그날로 맞아죽는 것밖에 되지 않으니, 실효 없게 개죽음이야 당할 수 있느냐? 라는 신중론을 내세웠다. 양측의 이론이 다 같이 일리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름 없이 `죽는다’ 할지라도 우리의 연약한 보잘것없는 생명들이 조국 민주주의의 번영에 한 줌 밑거름이나마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서 우리는 족하지 않는냐 라는 결론에 마침내 도달해 이들 3개 고교 대표학생은 “천당에서 만나자”는 결연한 악수를 나누고 28일 거사에 나섰던 것이다.』
2·28 민주운동은 대구시내에 소재한 8개 고등학교의 1·2학년 학생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들은 모두 국·공립고등학교의 학생들이었는데, 대략적으로 학교별로 당시의 상황을 재현해 보자.(오창균, “2·28 민주운동의 전개과정”, 『2·28 민주운동사』(2·28민주의거40주년기념사업회, 2000) 참조.)
2월 28일, 제각기 단단히 결심한 경북고 학생들은 12시쯤부터 하나 둘씩 학교에 모이기 시작했다. 12시 30분이 되자 반수 이상의 학생들이 등교했지만, 모두 교실 밖에서 무리를 지어 앞으로 일어날 사태에 대해 수군거리고 있었다. 12시 50쯤 대부분의 학생들이 등교했고, 800여명에 이르는 전교생이 조회단 앞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움직임을 알아차린 교사들이 학생들을 분산시키려고 애썼다. 이때 결정적인 자극은 대구고 학생부위원장의 방문소식이었다. 대구고 학생들이 이미 교문을 나섰다는 소식을 접한 경북고 학생들은 폭발했다. 12시 55분이 되자 학생부위원장 이대우(전 부산대교수·타계)와 학생위원 안효영이 갑자기 두루마리 결의문을 움켜쥐고 단상에 뛰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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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경북 도청과 경북경찰청이 들어서 있던 경상감영공원 전경. 도청이 산격동으로 이전하면서 현재는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변모했다. 김대식기자 deskm@idaegu.co.kr |
『…인류역사에 이런 강압적이고 횡포한 처사가 있었던가. 근세 우리나라 역사상 이런 야만적이고 폭압적인 일이 그 어느 역사책 속에 끼어 있었던가? 우리는 배움에 불타는 신성한 각오와 장차 동아(東亞)를 짊어지고 나갈 꿋꿋한 역군이요, 사회악에 물들지 않은 백합 같은 순결한 청춘이요, 학도이다.
우리 백 만 학도는 지금 이 시각에도 타골의 시를 잊지 않고 있다. `그 촛불 다시 켜지는 날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꿈을 안고 자라나는 우리가 현 성인 사회의 정치놀음에 일체 관계할 리도 만무하고 학문슥듭에 시달려 그런 시간적 여유도 없다. 그러나 이번 일은 정치에 관계없이 주위에 자극 받지 않는 책 냄새, 땀 냄새, 촛불 꺼멓게 앉은 순결한 이성으로써 우리는 지금까지 배운 지식을 밑바탕으로 하여 일장의 궐기를 하려 한다. 백 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
학도들의 붉은 피는 지금 이 순간에도 뛰놀고 있으며, 정의에 배반되는 불의를 쳐부수기 위해 이 목숨 다할 때까지 투쟁하는 것이 우리의 기백이며, 정의감에 입각한 이성의 호소인 것이다…』 결의문을 읽어 내려가는 부위원장의 음성은 떨렸고, 흥분이 고조된 800여 학생들은 함성을 지르고 박수를 쳤다.
학생들의 고함소리와 교사들의 제지로 결의문 낭독은 3분의 1가량을 건너띤 채 진행되었다. 그 때 누군가「우리의 뜻을 사회에 알리자」, 「반월당으로 가자」라고 외쳤다.
오후 1시 5분, 전교생은 우렁찬 함성을 지르면서 교문을 향해 달려갔다. 교직원들이 필사적으로 제지했으나 사태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고, 대부분의 학생들은 별 다른 충돌 없이 교문 밖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시위대열은 삼덕교회 정문 앞을 지나 반월당 네거리에서 잠시 멈추었다가, 한 학생이 「도청(현 경상감영공원)으로 가자」,「道學務담당자에들에게 우리들의 뜻을 시위하자」고 외치자 시위대는 중앙로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중앙파출소(현 대구중부경찰서 중앙치안센터) 앞을 지날 때에도 경찰과의 충돌은 없었다.
매일신문사(현 농협) 앞에서 약 3분간 머무르며 『횃불을 밝혀라 동방의 빛들아』『학원을 정치도구화하지 말라』『학원 내에 미치는 정치세력 배제하자』는 구호를 외치며 자신들의 주장을 언론기관에 호소했다. 학원의 정치도구화 반대를 절규하듯이 부르짖는 백여 미터의 시위행렬은 중앙통에서 시민들의 환호와 지지를 받으면서 사기가 더욱 고조되었다.
구호를 외치는 시위행렬은 1시 40분 경 경북도청에 진입했다. 곧 백여 명의 경찰관이 도청문을 닫은 채 학생들을 포위했다.
이를 눈치 챈 학생들이 경찰과 충돌하면서 치고 때리는 식의 상호폭력대결이 벌어졌다. 도청 정문을 밀치고 빠져나온 나머지 학생들은 그 길로 자유당 도당사 앞으로 달려갔다. 당국은 마침내 수 백 명의 경찰병력을 투입했고, 무자비한 공포세례와 억센 주먹이 난무하는 유혈극 속에 50여명의 학생이 체포되자 학생들은 옛법원(대구백화점과 삼덕파출소 사이) 방향과 시청 방향, 두 갈래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동문시장(동아백화점과 시청 사이 오른쪽 편) 골목을 지나 청구대학(현 노보텔) 옆길까지 나온 학생이 90여명, 시청 쪽으로 쫓겨간 학생이 150명 가량 됐다. 그러나 법원 쪽으로 몰려온 학생들이 다시 뭉쳐 다음에 취할 행동을 의논하는 도중에 경찰차가 가운데로 뛰어들면서 학생들은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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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산육거리를 거쳐 삼덕교회(가운데 붉은 벽돌건물)에 다다른 경북고 학생들은 오른쪽 길로 중앙파출소로 향했고 또 한 무리는 왼쪽으로 갈라져 반월당으로 향했다. 김대식기자 deskm@idaegu.co.kr |
한편 반대쪽으로 갔던 150여명은 다시 시청광장에 집결했다. 시위대는 시청에서 다시 강력한 경찰병력과 충돌하고 거기서 다시 고서점가(古書店街)(현 칠성동쪽)와 동인파출소 및 옛 대구일보사(현 시청주차장 부근) 쪽의 세 갈래로 갈라졌다. 그러나 대구지구 16헌병대(현 동인동 경북광유) 방향에 집결한 90명의 학생들은 당당하고 질서 있게 지사관사(현 우리들 병원)로 행진해 지사관사를 에워쌌다. 경북고 시위대는 서서히 대구지구 16헌병대쪽으로 이동했고, 헌병대 앞에서 남대구서에서 달려온 10명의 경찰과 부딪쳤다. 이 때 선두에서 진두지휘하던 학생이 경찰에 체포됐고, 그 때부터 데모대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남은 70여명이 군데군데 모여 또 다른 집결지를 모색했으나, 더 이상 시위는 감행하지 못했다. 이렇게 학원의 정치도구화를 반대하는 경북고 학생들의 시위는 1시간 50분 만에 해산됐다.
대구고등학교의 경우 2월 26일까지도 일요등교 지시가 없었다. 그러나 2월 27일, 그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대구고등학교에서도 이튿날(일요일) 등교(토끼사냥)를 발표했다. 2월 28일 아침 대구고 학생대표들은 경북고, 사대부고 대표들과 합의한 대로 시위를 결행하기로 했다.
그러나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된 것만은 아니었다. 우선 결의문을 정서하기로 한 동료가 아버지에게 발각되어 결의문을 빼앗겼고, 교사인 부친은 이를 불태워 버린 것이다. 학생대표들은 결의문 없이 행동하기로 했다. 또 다른 문제는 전개상황을 매시간 마다 알려주기로 한 경북고에서 도무지 연락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윽고 시간은 낮 12시가 되었으나 학교에서는 토끼사냥 갈 준비를 하지 않고 학생들을 귀가시키지도 않은 채 마냥 붙들어 놓고만 있었다.
상황이 다급해지자 이번에는 손진홍 학생위원장이 경북고로 갔다. 그 때 경북고 운동장에는 학생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손진홍을 만난 경북고 학생대표들은 경북고의 참여는 불가능할 것 같다는 비관적인 자세를 보였다. 손진홍은 흥분된 어조로 “우리는 벌써 교문을 나섰다”고 외치며 서두를 것을 종용했다.
손진홍은 학교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던 중 경북고생들이 학교 밖으로 진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동료학생들의 자전거에 올라타 정신없이 학교를 향해 달렸다. 숨은 헐떡거리고 다리는 후들후들 떨렸다. 교문을 들어서자마자 자전거를 내동댕이친 그는 『가자!』『가자!』『우리도 민주대열에 합류하자』 라고 외치며 교문을 뛰어들었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토끼사냥에 대한 훈시를 듣고 있던 학생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히 뛰쳐나갔으나, 교사들의 제지로 백 여 명만이 교문 밖 진출에 성공했다. 길거리로 나선 1차 선발대 학생들은 중앙통 쪽으로 마구 뛰었다. 경북여고 앞에 이르자 구호를 외치면서 반월당을 거쳐 중앙파출소 방향으로 나아갔다. 「우리에게 인류애를 달라!」「학생을 정치도구화 하지 말라!」는 함성이 사방에 울려 퍼졌다. 그러나 때마침 경북고 데모대가 중앙파출소 앞을 지나간 후 비상령이 내려 바리케이트를 치고 있던 중이라, 이를 뚫지 못하고 경찰 방망이 세례에 쫓겨 학교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1차 선발대가 교문을 나간 뒤 학교 안에 남은 부위원장 장주효는 조회단에 뛰어 올라 경북고가 채택한 결의문을 읽다가 교사들의 제지를 받고 교무실로 끌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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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면 도로가 대봉동 경북고등 학생들이 들이 봉산육거리 방향으로 쏟아져 나온 도로. 당시엔 넓었던 도로가 새 도로들이 개설되는 바람에 골목길처럼 보인다. 김대식기자 deskm@idaegu.co.kr |
그러던 중 1차 선발대가 교문을 들어서자 이들과 남은 학생들은 합류해 대열을 갖추고 다시 교문을 나섰다. 교사들도 어이가 없는지 그냥 우두커니 지켜볼 뿐이었다.
큰길로 나온 학생들은 질서 있게 행진했다. 학생들은 제각기 『야!』하는 고함을 지르며 힘찬 자기 다짐을 하고 있었다. 대열의 좌·우측에는 주로 듬직한 체격의 학생들이 서서 외부의 제지를 막기로 했다.
이들은 남문시장 네거리에 이르러 경찰과 마주쳤다. 경찰차는 사이렌을 울리며 달려들고 소방차도 경적을 울려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다. 어디선가 정·사복 경관들이 나타나 학생들을 연행하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방망이에 얻어맞고 구둣발에 채이면서도 『횃불을 밝혀라! 동방의 빛들아』를 외치며 도청방향으로 진출을 시도했다. 연도의 시민들은 박수로 치며 격려하거나 도망치는 학생들을 숨겨주었다.
이처럼 격렬한 대치 속에서도 40~50여명의 학생은 경찰의 저지망을 뚫고 대구 역전에 다시 모여 「우리에게 자유를 달라」고 외치다 결국 경찰에 의해 강제해산 당했다.
경대사대부고는 2월 28일의 거사가 있기 전에 이미 노가바(노래가사 바꿔 부리기) 사건으로 교내·외를 떠들썩하게 한 적이 있었다. 2월 16일, 1학년 학생이었던 오석수, 유효길, 이영길 등은 당시 유행하던 「유정천리」라는 노래의 가사 대신에 그 전날 서거한 조병옥 박사를 애도하는 내용을 담은 가사로 바꿔 칠판에 적었다.
「가련다 떠나련다 海公선생 뒤를 따라/ 장면 박사 홀로 두고 趙박사는 떠나가네 / 가도 가도 가망 없는 당선길을 몇 구비냐 / 자유당에 꽃이 피네 민주당에 비가 오네 / 세상을 원망하랴 자유당을 원망하랴 / 춘삼월 십 오일 조기선거 웬말이냐/ 천리 타국 땅에서 객사죽음 웬말이냐 / 시름 없는 신문 들고 백성들은 울고 있네」라는 노래는 삽시간에 학교 안에 퍼지고, 다시 대구시내로 번져나갔다. 급기야 그 내용이 동아일보에 가사와 함께 소개되자, 전국적으로 알려져 어린 초등학생이나 시골의 농민들까지 애창하게 됐다.
1956년 제3대 대통령선거 때 해공 신익희 선생이 갑자기 서거하자 『비내리는 호남선』이라는 유행가가 불렸던 것만큼 확산됐던 것이다. 노가바 사건으로 남대구경찰서 형사들이 학교에 찾아와 추궁하자, 이에 못 이긴 학교당국은 세 명의 학생을 표면상 무기근신 시켜놓고 계속 등교하도록 했다.
이 사건은 자유당 정권을 못마땅해하던 사대부고 학생들의 가슴에 미움을 더하게 만들었고 결국 2·28의 행동으로 이어졌다. 경북사대부고에는 2월 27일 제 9회 졸업식이 끝난 후 종회 시간에 일요등교 지시가 내려졌다. 담임선생들은 2월 28일(일) 12시 30분까지 이유 불문코 전원 등교해서 청소를 한 후에 재미있는 게임을 한다는 전달을 한 것이다. 그 표면적인 이유는 청소와 게임이었으나, 그 진짜 이유는 수성천변에 있을 야당 유세장에 학생들이 가는 것을 막고자하는 자유당 독재정권의 음흉한 술책이었음을 학생들은 이미 눈치 채고 있었다.
이날 오후 대구고등학교 학생위원장 손진홍이 사대부고의 학생대표 최용호를 찾아와, 당국의 부당한 일요등교 지시에 대한 대응책을 논의했다. 이들은 함께 저녁 무렵 경북고등학교 부학생위원장 이대우의 집에 합류하여 일요등교 반대시위를 위한 3개교 연합전선을 구축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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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면으로 보이는 도로는 옛 동문시장 길. 옛 도청을 거쳐나온 학생들이 저 길을 거쳐 앞에 보이는 시청 네거리에서 16헌병대, 동인파출소, 헌책방 골목 등 세 방향으로 흩어져 해산했다. 김대식기자 deskm@idaegu.co.kr |
28일 새벽 최용호는 김영대, 문태길 등 학생회 간부들을 찾아 나섰다.
경찰의 감시 등으로 타교에 비해 공감대의 형성과 여론 수렴시간이 부족했기에, 간부들은 일찍 학교에 나가 긴급회의를 열어 행동계획을 논의키로 했다. 또한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거사계획을 사전에 AP, AFP, UPI 등 해외의 유명통신사에 알려, 국제적 관심을 불러일으키자는 논의도 했다.
11시경 과학실에 이들을 포함, 박재철, 김관희, 홍 관, 배 순, 손원익을 비롯한 대의원들이 모여 긴급 학도호국단 간부회의가 열렸고, 참석자들은 즉각 일요일에 등교시킨 행정 당국의 저의를 따지고자 장시간 논의한 끝에 시위를 하면서 도지사를 직접 항의 방문키로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이를 눈치챈 선생님들이 교문을 잠그고 학부형들과 합세하여 지키는 바람에 좀처럼 교문을 빠져나갈 수 없게 되자, 오후3시 경부터 본관 2층에서는 단식 농성투쟁에 돌입했다. 농성 4시간이 지난 밤 7시에 200여명의 부고생들은 부모와 선생들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담장을 넘어 스크렘을 짜고 데모에 돌입했다.
이들은 삼덕로터리와 경북대학병원을 지나 경상북도지사 관사와 자유당 도당청사에서 시위를 하다가 급거 출동한 경찰 백차와 정면충돌해 수명의 학생이 부상을 입고, 또 연행됐다. 경찰에 끌려갔던 학생들은 조사를 받은 뒤 밤 11시경에 귀가했으며, 주동학생 몇 명은 담임선생 집에서 보호를 받았다.
경북여고와 대구여고(현 국채보상공원 자리) 등 여학교에도 일요등교지시가 내려졌다. 경북여고 학생들은 별 이유 없이 일요일 낮 12시까지 등교하게 됐으며, 대구여고는 졸업생 송별회와 무용 발표회 참석을 이유로 들었다. 28일 경북여고에서는 道 장학사의 특별연수 강의가 있었다. 일요일인데도 불구하고 학교에 나온 전교생이 강의를 들으려고 강당에 모였는데, 분위기가 얼마나 산만했던지 제대로 진행이 되지 않은 채 끝났다. 이때쯤 신구자 학생회장이 앞으로 나가 일요등교의 부당성을 일일이 지적하며 모두 거리로 나설 것을 호소했다.
학생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가자, 수성천변으로!」「경고생들도 나섰단다」등의 함성을 지르며 일어섰다.
당시 타학교의 시위소식에 놀란 학교당국은 전체 교사들을 동원해 정문을 지키며 만일 발생할지도 모르는 학생들의 단체행동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약 700명의 전교생이 갑자기 정문을 향해 뛰어나오자 교사들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거의 분산 상태로 교문을 빠져나온 학생들은 각자 집으로 돌아가고, 약 100여명은 대열을 지어 행진했다. 이들이 덕산동 쪽으로 향할 때 일부 대구여고생들과 합류하게 됐다. 두 학교의 여학생들은 「일요수업을 폐지하라」 고 외치며 덕산동을 거쳐 수성교로 행진하던 중 경찰의 제지를 받아 30여명은 연행되고 나머지는 해산됐다.
2월 27일 오전 대구공업고등학교의 담임교사들은 자세한 설명 없이 일요등교를 지시했다. 학생들은 영문도 모른 채 어리둥절 해하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이튿날 아침 점심시간이 지나면서 아무런 이유 없이 등교한 학생들은 동요하기 시작했으며, 교무실 옆 도서실에는 학생위원장 주재로 운영위원회가 열렸다.
긴급히 개최된 운영위원회에서는 학생자율을 탄압하는 교장은 물러나라는 성명을 냈다. 또 일요등교지시로 국·공립 중·고등학생들이 정치도구로 이용되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격분한 200여명의 학생들이 운동장에 모였다. 교내 곳곳에서 학생들이 집회를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위원장을 선두로 한 대열이 신암초등학교 정문 쪽으로 나서며 「집으로 돌아가자」「학생탄압을 중지하라」「교장은 퇴진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교사들이 이를 말리자 일부 학생들은 경북대학교 정문 쪽으로, 일부는 신도극장 쪽으로 행진을 계속했으나 신암교를 건너는 순간 경찰에 의해 강력한 제지를 받게 됐다. 출동한 경찰이 사정없이 방망이를 휘두르는 것을 본 학생들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다.
대구농고(현 대구은행 본점 자리)에서도 道 지시에 따라 여러 차례 교직원회의를 열고 28일 일요등교시 졸업식 예행연습과 음악지도를 하기로 결정했다. 학생들의 반발을 우려하면서 이러한 등교지시를 했으나 28일 학교에 나온 학생은 얼마 되지 않았다. 물론 대구농고 학생들도 시위를 계획했다. 그러나 교장선생의 간곡한 만류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학생들의 신변안전을 걱정하는 교장선생의 심정을 학생대표들이 받아들인 결과였다.
2월 27일 대구상고(현 센트로펠리스)에도 일요등교 지시가 있었다. 일요일이지만 졸업식 예행연습을 해야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다음날 등교한 학생들은 강당에서 예행연습을 하다가 밖으로부터 경북고 시위대의 함성을 듣게 되었다. 모두들 일요등교로 마음 속에 불만이 가득했으므로 강당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일부 학생들은 일어나서 창문 쪽으로 가거나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대부분의 교사들은 모른채 방관했지만 몇몇은 야단을 치면서 문을 닫아 걸어버렸다. 결국 졸업식 예행연습은 어수선하게 끝나고 뿔뿔이 헤어져 야당후보 연설을 듣기 위해 수성천변으로 가거나 시위대에 합세했다.
이틀에 걸쳐 학원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부르짖었던 대구지역 고등학생들의 시위는 일단 이렇게 끝났다.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니었다. 대한민국의 민주 운동은 그렇게 시작되었던 것이다.
▨ 참고문헌「2·28 민주운동사」(2·28민주의거 40주년 특별 기념사업회)
입력시간 : 2010-02-25 11:21: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