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 민주운동의 역사적 의의
3.1운동, 6.10만세운동, 국채보상운동 전통계승한 순수.숭고민주의거
3.15마산의거, 4.19혁명 도화선...한국 민주주의 발전 초석 다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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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2월 28일 대구지역 고등학교 학생들이 자유당 정권의 부정과 부패에 맞서 떨쳐 일어났다. 그것을 2·28대구민주운동이라고 한다.
그들의 항거는 학생들과 시민들을 민주당 선거유세에 참석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일요일에 등교하라는 강압적 조치에 대한 단순한 불만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의 항거는 1950년대 자유당의 독재 정권 아래서잉태되고 있던 대구 시민들의 저항정신과 학생들의 이성적 비판의식에 따른 민주시위였다. 그날에 거리로 뛰어나간 2천 3백 여 명의 학생들은 야당도시 대구의 전통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던 민주민족정신을 분출시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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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통 반월당 부근에서 합류한 고등학생들이 매일신문사를 거쳐 경북도청(현 경상감영공원) 쪽으로 민주화 구호를 외치면서 이동하고 있다. 사진=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제공 |
2·28대구민주운동을 이끌었던 주체세력은 학생들이었다. 그들은대구 시내에 위치한 경북고, 대구고, 사대부고 등 8개 학교 1,2학년 학생들이었다. 그들은 3·1운동, 6·10만세운동, 광주학생운동에서 보여준 선배 학생들의 전통을 뒤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국채보상운동과같은 대구·경북지역의 민주민족운동의 전통을 계승하였다. 이 때문에2·28은 순수하고 숭고한 민주의거였다고 평가되는 것이다.
2·28대구민주운동을 대표하는 정신은 학생들의 자유 민주주의를향한 항거였다. 학생들은 자유당의 부정과 부패에 맞서서 학원의 자유라는 횃불을 높이 들고 자유와 민주주의를 향해 떨쳐 일어났다. 1960년 당시 한국 사회는 이승만 정권의 부패와 자유당의 독재로 위기를맞고 있었다. 전국적인 반자유당 정서가 확산되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 “못 살겠다 갈아보자”라는 민주당 구호에서 드러나듯이 자유당의독재와 부패 그리고 불법·부정선거에 대한 분노가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었다. 자유당 정권은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비판세력을무자비하게 탄압하고 억누르고 있었다.
이러한 숨 막히는 자유당의 탄압 아래 1960년 3월 15일의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던 대구·경북지역에서도 선거부정이 노골적이었다. 심지어는 학생들을 이용하여 선거운동을 방해하려고까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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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의 불씨가 되었던 대구 2.28 민주화운동을 기념하기 위한 공원이 옛 중앙초등 자리에 조성되어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김대식기자 deskm@idaegu.co.kr |
2월 28일은 일요일인데도 불구하고 학생들을 강제로 등교시키게 했던것이다. 민주당 장면 박사의 선거유세에 학생과 시민들이 참가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오히려 대구·경북지역에서의 반자유당 분위기를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독재 정권의 선거 부정에 대해 시내 고등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저항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학생 대표들은 2월 28일 시위를갖기로 계획하고 그 전날에 이미 시위 구호와 방법을 준비하였다. 대부분의 대구시내 고등학교 학생들이 이 시위에 참가하였다. 대열을 지어 거리를 행진하는 학생들에게 시민들은 지지와 박수를 보냈다. 심지어는 경찰에 쫓기는 학생들을 시민들은 보호하기도 하였다. 학생들만의 시위가 아니라 시민들도 적극 동참하고 있어서 시민운동의 모습을띠기도 하였다.
학생들이 시위 과정에서 외친 구호와 낭독한 결의문의 내용에는 학생들이 시위에 나선 목적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횃불을 밝혀라 동방의 빛들아” 라는 구호 속에는 진정한 자유민주주의를 수립해야 한다는 시대정신이 나타나고 있다. 또한 부패 정권의 학원 탄압에 대한 저항의식이 표현되고 있다. 2·28에는 민주정치를 실현하려는 학생들의목적의식이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준비 과정이 체계적이고 조직적이었다.
2·28은 3·15마산의거와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면서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대구에서 시작된 학생들의 시위는 3월 15일까지 서울 대전 부산 등지로 확산되어갔다. 대구 2·28의 실상과 그 내용이 전해지면서 국민들의 자유 민주주의와 정권 교체에 대한 요구는한층 뜨거워졌고 자유당 독재 타도와 국민 주권 쟁취를 위한 저항으로발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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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두류공원에 있는 2.28대구학생민주화의거 기념탑. |
자유당의 3·15부정 선거는 마산의 유혈 사태로 발전하였다. 4월 12일에 김주열의 시신이 떠오르며 전 국민의 분노는 마침내 폭발하였다.
대구의 고등학생들에 의해 시작된 2·28이 마산을 거쳐 서울로 확산되어 4·19에서 대학생과 시민들의 민주혁명으로 발전했다. 즉 2·28이이승만 대통령을 하야시키고 자유당 12년 독재를 종식시켰다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바야흐로 2·28의 정신과 그 맥이 4·19혁명으로 더욱 굳건해지게 된 것이다.
1960년대 이후 독재정치와 부정부패에 항거한 한국 민주운동의 시작이 2·28이었지만 5·16쿠데타로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2·28에서시작된 대구경북지역의 민주운동은 정체될 수밖에 없었다. 2·28의 한국 민주 발전에 대한 역사적 공헌에도 불구하고 3·15마산의거나 4·19혁명에 비해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게 되었다면 그 이유를 여기에서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군사정권아래에서도 2·28대구민주운동의 정신과 맥은 끊어지지 않고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1964년의 6·3사태를 주도한 대학생들이바로 대구 2·28을 주도한 청년 학생들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2·28을기념하여 명덕로터리에 세워진 2·28기념탑을 중심으로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계속하였다. 2·28의 전통이 5·16으로 좌절되었지만 민주 선거를 위한 저항의 역사는 1987년 6월 항쟁까지 계속되었다. 대통령직선제를 쟁취하기 위한 6월 항쟁은 민주 선거를 위한 2·28의 숭고한 저항 정신을 계승하고 있었던 것이다.
1990년에 2·28 대구민주의거기념사업회가 발족되면서 2·28은 새롭게 평가되기 시작하였다. 그 중요한 성과가 2009년 12월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법이 개정되면서 2·28이 민주화 운동의 하나로 평가받게된 것이다. 2·28이 학술적인 평가에서만 아니라 법률적인 측면에서도3·15와 4·19로 이어진 한국 민주화운동의 효시로 그 지위를 확고히 하게 한 것이다.
이제 남은 과제는 대구·경북의 학생 시민들이 부정과 부패에 항거하여 일어났던 2·28의 정의롭고 숭고한 정신을 계승하는 일이다. 2·28 민주의거야말로 한국현대사에서 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순수한 학생운동이었고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우리 대구·경북의 자랑이자 긍지이기 때문이다. 양정봉기자중앙통 반월당 부근에서 합류한 고등학생들이 매일신문사(현 농협)를 거쳐 경북도청(현 경상감영공원) 쪽으로 민주화 구호를 외치면서 이동하고 있다.
양정봉 기자
▨ 참고문헌「2·28 민주운동사」(2·28민주의거 40주년 특별 기념사업회)
입력시간 : 2010-02-25 11:10: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