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주효/서동활/손진홍(모두 1회) 동문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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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회 작성일 25-03-26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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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동문의 2․28 증언

 

1) 장주효(제1회) 동문의 증언

 

<일요일 등교 지시>

 

여기에 당시 학생으로서 이 시위에 직접 참여했던 세 동문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2․28 의거의 선두 주자였던 본교 학생들의 시위 상황을 소상히 알아본다.

 

2월 27일, 내일은 교내 운동시합을 하니(뒤에 토끼 사냥으로 바뀜) 한 사람도 빠지지 말고 등교하라는 지시가 각반 조례시간을 통해 전달되자, 그렇지 않아도 경북고에서 2월 25일 일요일 등교 지시가 내려 비판의 소리가 드높던 때라 학생들은 벌집을 쑤셔 놓은 듯 담임교사에게 “왜 하필이면 일요일에 운동시합을 하느냐?”, “이런 부당한 처사에 우리는 따를 수 없다.”고 하면서 강경하게 반발했다.

 선생님들은 “내일 학교에 나오지 않으면 모두 처벌하도록 되었으니 꼭 등교해야 한다.”고 강요하면서 모두 제군들을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한 조치이므로 협조해 달라고 달랬다. 그러나 학생들은 계속 “우리는 정치이용물이 될 수 없다.”고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바로 수업을 시작했으나 교실 구석구석에서는 웅성거리며 비판하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때마침 교실 창문을 통해 보니 앞산 밑 골짜기마다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며 자유당 정견발표장으로 끌려가고 있는데, 특히 반공청년단의 푸른 깃발이 보이자 학생들은 울분을 어디에 터뜨려야 할 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눈물을 삼켰다.

 

학생위원들은 수업도 하지 않고 교장선생님을 만나 내일 행사를 연기해 줄 것을 강력히 건의했다. “교장 선생님, 오늘은 자유당 정견발표가 있는 날이니 단축수업을 하고 강연을 들으러 가야지요?”, “그렇다.”, “그럼, 내일은 민주당 강연이 있는데 일요일이니 부모님들이 강연을 듣도록 집을 지킬 수 있게 행사를 다음날로 연기해 주십시오.” 하고 건의했으나 교장선생님은 괴로운 표정을 지으면서 묵묵부답이었다.

 

모 선생님이 “제군들의 뜻은 충분히 안다. 그러나 대세는 이미 기울어졌다. 영웅도 시대를 따라야 한다.”고 말하자 학생위원들이 국경일도 일요일이면 그 행사를 익일로 미루는데 운동시합이 뭐 중요하다고 꼭 일요일에 해야 하느냐고 날카롭게 따지자, “부디 내일 하루만 무사히 넘기자.”고 호소했지만 학생들은 계속 일요일 등교의 부당성을 비판했다.

 

이 날에는 여당인 자유당의 선거유세가 수성천변에서 있었다. 여기에 도 산하 모든 공무원과 학생들을 동원하기 위해 도의 지시로 각 학교마다 단축수업을 하자 본교도 3시간 수업을 마치고 학생들을 하교시켰다.

 

<밤새운 시위 계획>

 

당시 학생위원장이었던 손진홍과 몇몇 학생위원들은 2월 27일 저녁 7시경 평소 잘 알고 지내던 경북고 부위원장 이대우 등 6, 7명의 경고생과 만나 일요일 등교의 부당성을 성토하면서 이에 대한 대책을 숙의한 끝에 저녁 9시경 불의에 대해 끝까지 싸울 것을 결의했다.

 

즉, 양학교의 등교시간이 12시인 그때그때 상황을 전화로 연락하며 오후 1시에 운동장에 모여 결의문을 낭독한 후 바로 ‘데모’에 돌입, 반월당에서 합류하기로 했다. 결의문은 두 학교가 별도로 작성하고 구호는「횃불을 밝혀라, 동방의 별들아!」,「우리에게 자유를 달라!」,「신성한 학원을 정치도구화하지 말라」,「우리에게 인류애를 발휘하라」등으로 결정했다.

 

막상 시위하기로 결정했으나 대구고는 경북고보다 일요일 등교지시가 뒤늦게 학생들에게 전달된 터라 별다른 마음의 준비가 없었다. 밤10시경 경북고 대표들과 헤어진 후, 학생위원들을 찾아가 내일 시위 계획을 설명하고 적극 참여할 것을 약속 받고는 밤 12시가 넘어 다시 경북고 대표들과 만났다. 그들은 그 동안 자체 내의 사정으로 학교에서 결의문만 채택하고 시위는 하지 않기로 변경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시위의 강행을 주장하는 대구고생과 변경을 주장하는 경북고생들 사이에 일대 논쟁이 벌어져 새벽녘이 가까워서야 다시 시위를 관철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2․28이 있기까지>

 

마침내, 2월 28일 10시경 학교 근처에서 긴급 학생위원회를 개최하여 오늘 시위에 대해 구체적인 대책을 마련하기로 했으나 갑자기 불의의 사고로 결의문이 외부에 발각되어 소각됨으로써 초긴장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경북고와 시간마다 전화연락하기로 한 당초 계획에 따라 연락을 취하니 소식이 없어서 하는 수 없이 대표를 경북고에 파견했더니 몇몇 학생위원이 반대하고 있어 시위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대답이었다.

 

급기야 대구고는 계획을 변경하여 2명이 1조가 되어 반월당 네거리에 집결하면, 경북고와 또 가장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던 사대부고도 참가가 가능할 것 같아 손진홍이 부고로 찾아 가 계획을 설명하고 시위에 참가할 것을 종용했으나 사대부고측에서는 오늘은 불가능하고 다가오는 3․1절을 기해 시위하자고 했다.

 그러나 본교는 어떤 상황에 놓이더라도 처음 계획대로 감행할 것을 통고하고 다시 경북고로 찾아가니 시간은 벌써 당초 시위를 하기로 약속한 12시가 넘었다.

이때까지 경북고는 몇몇 학생위원들의 반대로 시위는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난색을 표명하므로, 그럼 본교만이라도 강행하겠다는 비장한 결의를 통고하고, 이 후에 변경상황이 있으면 신속히 연락해 줄 것을 부탁했다. 본교 대표들은 반월당에서 학교 행 버스를 기다리던 중 경북고생들이 교문을 뛰쳐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줄달음쳐 학교로 왔다.

 

한편, 본교는 경북고와 사대부고가 자체 사정으로 계획의 실행이 어렵다는 소식을 듣고 깊은 허탈감에 빠진데다가 결의문마저 외부에 발각되어 초긴장상태에 놓여 있었다. 거기다가 학생위원들조차 경고와 부고로 계획 강행을 종용하기 위해 가 버린 탓에 제대로 학생들에게 시위 계획을 알리지도 못하고 있었다.

12시경 교직원 회의를 마치고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운동장에 집합시키고 있는 시각까지 경북고와 부고에 간 학생위원들로부터 연락이 없자, 우리만이라도 지금 계획을 실행하자는 학생들과 조금만 기다려 보자는 학생들로 논쟁을 벌이면서 조례단 앞으로 모여 착잡한 기분으로 교장선생님의 토끼 사냥에 대한 훈시를 듣고 있었다.

 

<가자! 가자!>

 

이 때 경북고에 갔던 학생위원들이 교문으로 뛰어 들어서면서 “가자!”, “가자!”고 외쳤다. 이때까지 다른 학교와 공동시위를 위해 학생위원들이 동분서주하느라고 정작 본교 학생들에게는 오늘의 계획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데다가 선생님들의 제지로 약 100여 명만 교문을 뛰쳐나와 경북여고 쪽으로 해서 반월당을 지나 중앙파출소로 향하면서 “우리에게 인류애를 달라”, “학생을 정치도구화하지 말라”고 구호를 외쳤다.

마침 중앙파출소 앞에는 경북고 데모대가 지나간 후라 비상령이 내려 바리게이트를 치고 있어 본교 선발대는 경찰제지망을 뚫지 못하고 방망이 세례에 몸부림만 칠뿐이었다.

 

한편, 1차로 학생들이 교문을 뛰쳐나가는 순간 나는 비상으로 준비하고 있던 결의문을 가지고 조례단에 뛰어 올라가 읽기 시작했다. 선생님들이 제지하며 결의문을 빼앗았다. 내가 교무실로 끌려가면서 “대고생은 다 썩었다.”고 외치면서 1차 선발대에 따르지 않은 학생들을 질타하자 모두들 눈시울을 붉히면서 또 한 번의 기회를 기다렸다. 이 때 1차 선발대 가운데 몇몇 학생들이 다시 교문으로 들어와 선생님들의 힘없는 제지를 뿌리치고 다시 대열을 정비하여 때마침 교장선생님이 “학생은 정치 도구화되어서는 안된다.”고 훈시하는 틈을 타 “교장선생님, 우리는 벌써 정치도구화된 것입니다.”, “학우들이여 가자!”고 외쳤다.

 

800여 명의 전교생이 한 사람의 낙오도 없이 교문을 박차고 서문시장 네거리에 이르러 경찰과 부딪혔다. 흰 ‘패트롤 카’는 사이렌을 울리면서 달려들고, 소방차도 마구 경적을 울리면서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다. 경찰들은 학생들을 방망이로 치고 구둣발로 밟으면서 닥치는 대로 수갑을 채워 연행하기 시작했다. 때로는 도망치는 학생들을 막힌 골목길에 몰아넣고 후려갈기면서 차에 짐짝처럼 넣어 실어 가기도 했다. 학생들이 경찰의 철권에 무자비하게 짓밟히자 자신도 모르게 벗을 구하려고 달려들어 경찰관의 손가락을 깨물기도 했다.

 

연도에 나선 시민들은 뜨거운 성원의 박수를 보내기도 하고 경찰에 쫓겨 도망치는 학생들을 자기집으로 숨겨 주기도 했다. 불의에 항쟁하는 학생들과 한마음이 되어 독재정권을 원망하면서 울분을 터뜨리기도 했다.

 

<다시 전열을 정비해서>

 

이 같은 무자비한 경찰제지망을 뚫은 학생들은 다시 전열을 정비하여 “횃불을 밝혀라, 동방의 별들아!”, “학원을 정치도구화하지 말라”고 구호를 외치며 경북도청(현 중앙공원)으로 향했으나 이곳저곳에서 경찰이 쏟아져 나와 학생들을 마구 체포하자 시위대는 제각기 골목으로 흩어져 40, 50명씩 대구시청과 대구역에 다시 모였다. 또 한 번 “학생들을 정치도구화하지 말라”, “우리에게 자유를 달라”고 소리 높여 외치며 시위를 벌이다가 경찰의 강력한 제지로 해산 당했다.

 

이렇게 강제 해산당한 학생들은 골목길로 숨어 달아났다. 골목마다 땀을 흘리며 쫓기는 학생들에게 시민들은 물을 떠 주고 부상당한 학생들을 치료해 주며 또 경찰이 있는가 살펴봐 주기도 했다. 도망가는 가운데 학우를 만나면 서로 부둥켜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으며, 붙잡혀 간 학우들의 신변을 걱정하여 이 골목 저 골목에서 웅성거리는 모습도 보였다. 한편, 선생님들도 학생들의 신변보호를 위해 2~3명씩 조를 짜서 시내에 돌아다니면서 귀가하지 않은 학생들을 무사히 집까지 데려다 주기도 하였다.

 

<보도에 어둠이 내려>

 

어느덧 이때까지 불의에 항거하여 우렁찬 구호를 외치던 거리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시위하다 붙잡힌 대구고생들은 경북도 경찰국(현 중앙공원)과 대구경찰서, 남대구경찰서 등에 분산 수용되어 심문을 받았다. 배후관계를 대라는 경찰의 닦달에 학생들은 하나같이 자발적인 행동이었다고 대답하면서 주소와 보호자를 물을 때에는 떳떳하게 답변했다. 이 날 오후 6시경 대구시 전역에 경찰비상령이 내려진 가운데 7시에는 사태의 악화를 막기 위해 연행된 대구고와 경북고생들을 전원 훈방한다는 극적 조치가 내려졌다.

 

이렇게 2․28 의거의 서장은 막이 내려졌다. 그러나 그 횃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건만 불의의 집단인 자유당은 끝내 뉘우치지 못하고 3․15부정선거를 감행함으로써,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마산의 시민봉기를 불러 일으켰고 끝내는 민중혁명으로서의 4․19 혁명을 낳게 했다.

 

 

2) 서동활(제1회) 동문의 증언

 

<1960년 2월 27일>

 

이제 며칠 안 있어 봄이 오면 3학년이 된다. 지금부터라도 정신을 차려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친구도 멀리하고, 교제하던 여학생에게도 찾아가서 “훌륭한 대학에 들어가서 다시 만나자.”고 이별을 고한 후 못내 아쉬운 발걸음을 억지로 되돌려 집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지 않고는 지난 고교 2년 동안의 문란했던 내 생활을 청산하고 마음을 잡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 날 밤 조용히 책상 앞에서 늦게까지 공부를 하고 있을 즈음 11시가 넘었는데 밖에서 다급하게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내 공부방이 도로변에 붙어 있었기에 첫 마디에 알아듣고 뛰어나가서 친구들을 방으로 안내했다. “야, 지금이 몇 시인데 이렇게 몰려 다니노!” 이렇게 묻고 나서 좌중을 훑어보니, 그때 학생운영회 부회장직을 맡고 있던 장주효 군과 5, 6명의 간부들이 거기에 있었다.

 

그들은 단도직입적으로 내일 거사에 협조해 달라는 것이었다. “내일 너도 알다시피 수성천변에서 해공 선생의 선거 유세가 있지 않니? 그런데, 내일이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학교에서는 토끼 사냥을 간다고 전교생 모두 등교하라고 하지 않았느냐! 뿐만 아니라 교내 체육대회다 무어다 하며 그럴듯한 구실을 붙여 시내 모든 학교가 내일 모두 등교한단 말이다. 이게 무슨 유치한 짓이고! 이젠 신성한 학원까지도 완전히 정치 도구가 안 돼 버렸나! 이거 우리 가만히 있을 수 있겠나!” 이렇게 장 군이 열변을 토하고 말을 끊으니, 방안이 숙연해졌다.

 

잠시 후 내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와 같은 정세를 난들 모르는 바 아니지만, 폭풍이 지나간 뒤에는 얼마만한 희생이 올 것인가를 계산에 넣어야 할 것이 아닌가? 희생을 각오한다면 일전에 우리가 굳게 약속한 맹세는 어떻게 되는 건가? 우리 모두 사관학교에 꼭 합격하여 나라의 간성이 되어 썩어가는 조국을 다시 일으키자고 한 약속 말이다.”

이와 같은 내 말에 다시 침묵이 흐른 뒤 장 군이 침통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면 좋다. 나는 기왕 각오한 바 있으니 동활이 너는 앞에 나서지 말고 내일 아침 학교에서 대열이 움직이지 않을 때 대열이 움직이게만 해 다오! 플래카드, 전단 등 모든 준비는 다 되어 있고 경북고교와도 협의가 되어, 10시에 교문을 박차고 나오면 남산파출소 앞에서 양교가 합류를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는 시내로 곧장 질주해 들어가는 거다.”라는 대략적인 설명을 하고는 12시 통금 사이렌이 울리기 직전에 모두들 황망히 떠났다.

 

<1960년 2월 28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나는 마루 밑을 뒤졌다. 수학여행 때 불국사에서 사온 벚나무 작대기를 찾기 위해서였다. 등교 길에는 약 50m 간격으로 동급생들이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나는 일일이 손을 들어 아는 체를 하고 학교에 들어섰다.

 학생들은 손에손에 벚나무 몽둥이를 든 채 운동장에 모여서 웅성거리고들 있었다. 오늘의 거사를 모두들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교무실에서는 직원조회가 열리고 있었고, 정각 10시에 양교에서는 동시에 전교생들에게 결의문을 낭독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경북고교에서 시작했다는 통보가 오지 않았던 것이다. 통신 방법은 50m 간격으로 서 있는 학생들의 릴레이식 거수신호 방법이었다.

 

“자, 10시 10분이다. 저쪽에서 연락이 없으니 더 기다릴 수 없다. 직원회의도 곧 끝날 테니 빨리 시작하자!”는 내 말에 부위원장인 장 군이 교단에 올라가서 오늘의 거사를 일으키게 된 동기부터 시작하여 행진 코스 등을 설명하고 만약 경찰과의 충돌이 있어 대열이 흩어질 경우 모두들 도청 광장으로 집결하라, 그 다음의 행동은 그때 상황에 따라 정한다는 열변을 토하고 있을 때 선생님들이 조회를 마치고 쏟아져 내려오셨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전우용 체육선생님이 먼저 교단으로 뛰어올라 장 군의 목덜미를 잡고, “이자식이 미쳤나!” 하시면서 직원실로 끌고 올라가셨다. 장 군은 끌려가면서 뒤를 돌아보고 외쳤다. “전부 나가라!, 빨리 나가라!”고. 그러나 대열은 웅성거릴 뿐 움직이지 않았고 선생님들은 교문으로 몰려가서 철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다. 그때 나와 친구 몇 명이 벚나무 몽둥이로 “나가자!”고 외치면서 학생들의 무리를 무차별로 두들겼다. 대열은 몽둥이에 맞지 않으려고 밀려난 것이 결국 교문 밖으로 터져 나왔다. 그때 교문을 지키고 섰던 성기용 음악선생님이 내 옷자락을 붙들고 너는 나가면 안 된다고 하셨다.

 

그 이튿날 3․1절 기념식이 있고 시가행진이 있는데다가 내가 악대부장의 직책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나 뿌리치고 달렸다.

 

대열은 토끼가 있는 비슬산 쪽이 아니고 시내를 향하여 내달렸다. 노도와 같은 대열이 영선못둑 위로 달렸다. 첫관문인 남산파출소는 아무런 저지 없이 통과하여 시내로 들어섰다. 학생대대장 김정일의 선창에 따라 구호를 외쳤다. “학원에 자유를 달라!”, “학생을 정치도구화하지 말라!” 등 구호를 외치면서 결의문도 뿌렸다.

 

붐비는 중앙통의 인파들이 이 광경을 보고 모두들 박수를 치며 환호를 보냈다. 그러나 중앙파출소 앞에는 경찰 백차들이 이렬 횡대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었다.

 

 여기서 일대 접전이 벌어지고 대열이 흩어져 일부는 중앙통으로 빠지고 일부는 수성교에 가보니, 유세장 쪽으로는 이미 사람들을 통과시키지 않고 있었고, 방천시장 앞 버스정류소에는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는데, 어디서 몰려왔는지 경북여고 학생들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손에 손을 잡고 유세장으로 몰려가려고 하고 경찰관들은 소방차와 경찰용 백차를 동원하여 여학생들을 자동차에 쓸어 넣어 싣고는 어디론가 질주해 가는데, 여학생들의 울음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는 것 같았다.

 

그때 유세장에서 들려오는 확성기 소리는 “우리들의 귀여운 자녀들이 의거를 일으키고 있는데 경찰은 이들을 무자비하게 연행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렇게 어수선한 하루가 지나고 그 이튿날은 아예 등교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타교에서도 데모사태가 우후죽순처럼 일어났다. 이튿날 밤늦게 주동자들이 잡히고 이들을 태운 경찰차는 시내를 다니면서 학생들에게 등교를 권했고 학원의 정상화와 사회의 안정을 호소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 날 경찰국과 대구서에 붙들려 들어간 학생들은 주모자가 누구냐는 추궁 때문에 고문도 당했다는 것이며, 벚나무 몽둥이를 누가 가지고 오라고 했느냐는 문제에 부딪혀 체육선생님이 토끼 잡으러 간다고 가져오라고 했다는 학생들 말에 전우용 체육선생님이 잡혀 가서 곤욕을 치렀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3) 손진홍(제1회) 동문의 증언

 

<2월 26일>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경북고등학교의 이대우(당시 부위원장)군을 만나서 일요일 등교설을 듣고 분해하면서 “그런 일이 어디 있는가?” 하고 놀라면서 대가리가 두 쪽이 나는 일이 있어도 기어코 싸워야 한다고 서로 마음속에 굳게 다짐했다.

 

그날 밤 겨울 방학 후 너무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그와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 중에 우리는 정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도저히 그냥 덮어 둘 수 없는 모순에 분개하고 투쟁할 결의에 불타올랐었다.(이날까지 우리 학교에서는 등교설이 전혀 없었다.)

 

<2월 27일>

 

이날따라 날씨는 매우 화창하게 개어 있었다. 학교에 나오니 학우들 사이에는 벌써 군데군데 모여서서 수군거렸으며 불평이 가득찬 표정들이었다.

 

여태까지 침묵을 지키고 계시던 선생님이 아침 조회에서 내일(일요일)은 교내 운동시합을 한다고 발표했다. 학생들은 이에 본격적으로 선생님에게 질문의 화살을 퍼부었다.(그때 시내에서 정부통령 입후보자 정견 발표회가 수성천 변두리에서 열린다는 가두방송과 벽보가 한창 나붙고 해서 모두가 알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선생님들은 시원스런 답변을 해주지 않았다.

 

학생들도 일요일 등교 이유가 민주당 정견발표에 방해를 하는 데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자꾸 물었다. 선생님들은 내일 학교에 나오지 않으면 단단히 처벌한다고 은근히 공갈 섞인 말을 늘어놓았다.

1학년 교실에 들어가니 모두들 등교 이유를 묻는 데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교감 선생님에게 가서 내일의 행사를 연기해 주기를 건의했으나 바위에 달걀치는 격이었다.

 

다시 교장 선생님에게로 갔다. “교장 선생님, 오늘은 자유당 정견발표가 있는 날이지요?” “그렇다” “그렇다면 오늘 네 시간 수업인데 세 시간으로 단축을 하여 일찍 집에 돌아가서 부모님들이 자유당의 강연을 들으려 가시고 난 뒤의 빈 집을 지켜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 “그러면 내일은 민주당의 강연이 있는데 학교에 등교하는 날이면 별문제이지만 일요일이니 우리는 집이나 지키고 부모님들로 하여금 강연을 들으시도록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내일의 행사를 다음 기회로 미루도록 합시다.”, “..........”

 

정당정치와 유권자들이 국가의 대통령을 뽑는 중요한 시기에 취해야 할 태도 등 공민시간에 배운 여러 가지 의견을 들어 말하였으나 관철될 리 없었다.

 

힘없이 교장실을 나온 나는 수업을 받았으나 도무지 머리에 선생님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섞어빠진 정치 사기꾼들의 장난에 학창의 순결성이 이렇게까지 더럽혀지고 있고 괴로움을 받지 않으면 안되는가 하는 생각에 기성사회를 비난도 해보았다. 나뿐이 아니고 다른 교우들도 거의 같은 생각들이었다.

 

창밖에는 파란 하늘이 드리웠고, 이따금 붕붕하고 떠올라가는 비행기들의 모습이 보인다. 전망하기 좋은 자리에 높이 세워진 본교이기에 바깥 풍경을 내다보는 재미란 여간 좋은 것이 아니었다. 때마침 앞산 밑 골짜기 마다 흰옷 입은 동민들이 장사진을 이루어 동장들의 인솔아래 시내 쪽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실로 근래에 보기 드문 많은 사람들이었다.

 

학생들은 순간 본능적으로 “야아!” 하고 소리를 질렀으나 모두 맥없이 주저앉고 말았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반공청년단의 푸른 깃발이었다. 흥분의 도가니에서 어쩔 줄 모르는 학생들은 그 울분을 어디에다 터뜨려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러나 도리가 없었다.

민주당 노래.......<가련다 떠나련다. 해공 선생 뒤를 이어 장면 박사 뒤에 두고 조 박사는 떠나갔네....>가 나타날까 싶어서 학생들의 호주머니 조사를 하는 학교당국에 대하여는 더 이상 말할 용기를 잃은 학생들이기 때문에.

 

학생과장 구자봉 선생은 나에게 몇 번이고 영웅도 시대를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나는 만약에 국경일이 일요일인 경우엔 행사를 그 익일인 월요일에 하라는 것을 대통령이 발표하였고 지금 실행하고 있는데 하물며 보잘것없는 운동시합 아니 토끼 사냥하는 것쯤으로 명목이 서느냐 하는 것과 그리고 김창룡 중장 살해사건 때 허태영의 운전수인 이유회가 허태영이 시키는 대로 행하다가 죽은 일을 들어 우리도 학교 당국의 말만 듣다가 우리들의 교육도 다 죽어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하고 되물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우물쭈물 하시면서 이론상으로는 진홍에게 지는 게지 할 수 있는가? 하시면서도 내일 등교를 강력히 주장하셨다.

 

나는 꼭 출석한다고 말씀드리고 나서 세 시간 공부를 마치고 나오니 자유당 강연장인 수성천변으로 끌려가는 민중들이 골목마다 거리마다 꽉차 있었다. 나는 그길로 부속고등학교에 가서 평소의 지우였던 최용호군을 찾았다. 때 마침 졸업식이 끝날 무렵이었다.

최군은 벌써 조박사의 고별의 노래인 <가련다 떠나련다. 장면박사 뒤에 두고.........>란 것을 부르다가 경찰서에 가서 시달렸다고 말하면서 군중들을 수성교로 모는 것을 맹렬히 비난하고 있었다.

 

최용호군과 나 그리고 대구고교의 윤풍홍군 세 사람이 대우군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러나 그는 없었다.

우리는 자유당 강연장으로 가서 연사들의 열변(?)을 듣고 시내로 나왔다. 만나는 친구들마다 풀이 죽어 있었다.

 

다시금 대우군 집을 찾았을 때에는 저녁 일곱 시쯤이었다. 조금 있으니 시내에 갔던 대우군도 오고 6,7명의 학우들도 모여들었다. 그들은 모두 평소에 같이 놀던 경북고교의 전화섭, 권준화, 정명소, 하청일, 윤종명, 대구고교의 윤풍홍, 장주효, 나, 부속고교의 최용호 등이었는데, 모두가 불의의 일요일 등교에 대해서 어떻게 할 것인가를 신중히 생각하고 있었다. 장주효는 뒤에서 땅바닥을 두드리며 한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모두가 흥분하여 끝까지 투쟁할 것을 맹세하였다. 풍홍군은 그냥 침묵을 지켰고, 윤종명군은 그 큰 몸집을 움직이면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한숨만 땅이 꺼져라고 쉬면서 불의에 대해 최후까지 투쟁할 것을 주장하였다.

모두들 끝까지 투쟁할 것에 동의했다. 방안 공기는 긴장할 대로 긴장해져 갔다.

 

학교는 제각기 등교시키는 구실이 달랐었다.

 대구고등학교에서는 토끼사냥이었고, 경북고교는 시험을 치른다고 했다가 학생들이 떠드는 바람에 영화구경으로 바꾸었고, 부속고교는 운동시합 등등이었다.

 

고등학교만이 아니고 중학교, 심지어는 국민학교의 어린 동생들까지도 등교시킨다는 너무나 가혹한 처사를 들었을 때 피가 끓는 젊은이들로서는 도저히 그냥 듣고 배겨낼 수가 없었다.

 

<가혹한 정치는 범보다 무섭다>는 공자님의 말씀도 있거니와 사실상 이러한 처사는 동서고금을 통하여 그 어느 역사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었다. 욕되게 살기보다는 차라리 정의를 위해서 싸우다가 쓰러지는 것이 떳떳하지 않은가? 만약 우리가 이 더러움에 굴복한다면 십대의 청소년마저 죽었다고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시간은 벌써 아홉시가 되었다. 막상 데모할 것을 결정하고 나니 경북고교는 학생이 많고 활약하는 무대가 빤하기 때문에 일하기가 쉬웠으나 우리는 단 세 사람이라 퍽 난처했다. 그러나 끝끝내 용기를 잃지 않고 생사를 같이 하기로 했다. 결의문은 두 학교가 같게 할까? 그렇지 않으면 다르게 할까 이 문제에 양론이 분분하다가 결국 달리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경찰의 제지에 억눌리지 않기 위해서 데모코오스는 파출소가 드문 미 8군 사령부 뒷문에 모여서 두 학교가 같이 시내로 행진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경북고교는 교문을 나가서 봉산파출소를 거쳐 반월당에 가서 두 학교가 같이 행진하면 힘도 더 나고 경찰의 제지도 어느 정도 뚫고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그렇게 하면 애로를 무릅쓰고 강행할 수도 있는 문제지만, 목표지점까지가 문제였다. 줄을 지어서 질서정연하게 달리느냐, 그렇지 않으면 마구 되는 대로 달리느냐. 그밖의 여러 난점을 두고 우리는 있는 머리를 다 썼다.

 

 우리는 토끼사냥을 한다고 운동장에 모일 것이고 경북고교는 영화구경을 간다고 하니 그때 운동장에 모일 것이므로 이 찬스를 이용하기로 하자. 또한 시간마다 전화로 서로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일을 하기로 하자. 구호는 <횃불을 밝혀라, 동방의 별들아!>, <우리에게 자유를 달라!>, <신성한 학원을 정치 도구화하지 말라!>, <우리에게 인류애를 발휘하라> 등으로 정했다.

 

열시를 알리는 소리를 계기로 해서, 모두 문 밖으로 나왔다. 우리 일행은 경고의 화성군과 대고의 풍홍군, 주효군과 나 이렇게 네 사람이었다.

 

지금 이 민족의 실정을 보라! 풀뿌리 나무껍질로 근근히 실낱같은 생명이나마 부지해 보려고 모진 고생을 달게 받으며 세월만 원망하는 농어촌 동포들의 참상을 생각해 볼 때,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일이 아니랴! 그리하여 우리들은 이 나라의 정치인들에게 대하여서 일대 경종을 울려 각성을 촉구하자고 몇 번이나 서로 다짐했다. 그리고 한편 술집에서, 당구장에서, 다방에서 흥청거리는 일부 학생들은 더욱더 용납할 수 없는 군상들이라는 이야기도 서로 간에 주고받았다.

그뿐인가 오늘의 자유당 강연장에 모인 군중들 중에 저 경산 쪽에서, 촌에서 인간대접은커녕 짐짝같이 실려온 불쌍한 농민들이 다리 밑에서 웅성거리다가 연단위에 선 신사 앞에 늘었을 때 그 신사의 입에서는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고, 사람 옆에 사람 있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위선적이고 가증스럽기까지 한 일이었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여러 대의원 집을 찾기로 했다. 처음으로 찾은 곳이 서동활군과 신의신군이었다. 그들은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70명은 동원하기로 하였다. 우리들의 첫 째 할 일은 내일 결석생이 없도록 전원 출석시킬 일이었다.

간혹 밤중에 찾아본 여러 친구들 중에는 시골 간 사람들도 있었다. 그럴 때에는 여간 실망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나는 사람마다 이구동성으로 적극 협력할 것을 약속하는 데는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마웠고, 억제치 못할 힘이 치밀어 올랐다.

 

그날 저녁 찾아간 곳은 김종하, 최종호(부재), 공정수 등이었고 대대장 김정일군의 집까진 못가고 열한시반 고동이 울렸다. 현 민의원이며 민주당원인 임문석 집에 있는 우리와 같이 적극 협력할 수 있는 동지인 임용대는 어떻게 하는가 하다가 김정일군의 집도 잘 모르고 하니 그에게 정일군의 연락도 부탁할 겸 찾았다. 용대군에게 우리는 자기 부친과는 떠나야 한다는 것을 누누이 설득하고 협력을 부탁했다. 그리고 우리들의 하는 일이 민주당이나 어느 정당을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도 말했다.

 

 통행금지 시간이 다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잠잘 곳을 찾지 못했으며, 용대군 집에 머물러선 안 된다는 것도 느꼈다. 마지막 고동 소리가 울렸다. 다시 우리는 대우군 집으로 달렸다. 대우군이나 효영군도 모두 잠을 자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여태까지의 계획이 급변했다고 한다. 그 내용인즉 데모는 단념하고 학교에서 결의문만을 읽고 그냥 헤어져 버리자고 한다. 주효군과 나는 분개하였다. 변경을 주장하는 대우군과 계속 관철을 주장하는 주효군과는 일대 논쟁이 벌어졌다. 투표로써 결정짓자는 이야기도 나왔으나 좀처럼 결말이 나지 않았다. 내일 낮에 전개될 일을 생각하고, 교육하고 계시는 선생님과 노부모님을 생각할 때 내 마음은 자연히 자꾸만 약해진다. 이제는 대우군도 데모하자는데 별 의의가 없었다.

 

날개 돋친 청운의 꿈을 잡으려고 허공에 손을 저으면서 노력하고 인생을 살아가는 데 커다란 명예욕도 도모해 보려는 설계도가 어느 누구에게도 있듯이 우리에게도 그러한 계획이 없을 리 없었다. 그러나 늦어도 내일 저녁만 되면 우리의 생생한 두 손목은 죄인 아닌 죄인으로 묶여질 것이고 며칠 후 공판을 받은 뒤엔 그 결과대로 징역(?)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니, 자꾸만 내 마음이 어지러워질 뿐만 아니라, 전 학생의 선두에 서서 내달리고 지휘하고 싶은 생각은 더구나 나지 않았다. 그러나 부모님에 대한 생각은 뒤로 미루고, 내 알몸뚱이 하나를 헌 신짝처럼 버리기로 결심을 하자, 또다시 용기가 되살아 올랐다.

우리는 힘차게 손잡았다. 대구고교에서는 나와 주효군. 경북고교에는 대우군과 효영군 네 사람이 생사를 같이 하기로 맹세했다. 우리가 데모를 한다고 해서 학생 전원을 처벌할 수는 없을 게다. 우리 네 사람만 희생이 되면 그만이고, 우리들의 빛나는 정신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며, 우리 민족 전체의 진로는 맑고도 밝게 동이 틀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일차 설계도를 이차 계획으로 죽지 않고 나오거든 저 강원도 첩첩 산중에 들어가서 괭이 들고 호미 들어 땅을 뒤지면서 벌도 치고 돼지도 기르면서 이 세상에서 찾을 수 없는 낙원을 건설하자고 했다.

 

<가련다 떠나련다.

어린 아들 손을 잡고

감자 심고 수수 심는

두메 산골 내 고향에

못 살아도 나는 좋아

외로워도....... >

 

고요히 부르는 노래 소리는 밤의 적막 속으로 살아져 갔다. 한시가 지나고 두시가 지나고 다시 세시를 쳐도 잠은 오지 않았다. 다시 애국가를 불렀다. 마음속에는 몇 번이나 불안과 초조가 휘몰아치다간 다시 냉정해진다.

 

그날 밤 같이 잔 사람은 주효, 대우, 효영, 풍홍, 화섭, 준화, 영소 등 제군이었다. 경북고교 결의문을 쓴 하청일군은 한해 선배로써 공납금 관계로 제적되어 있었다. 그는 자기 집에 갔다.

이윽고 다른 사람은 모두 꿈속에 잠기고 고이 쉬는 숨소리만 들리어 왔다. 한참 동안의 적막이 가신 뒤 대우군이 “진홍아!”하고 부른다. 내가 대답하니 잠이 오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잠이 올 리가 있나 하니 그러면 한 번 더 생각해 보자고 한다. 다시금 깊은 생각에 잠긴다. 고요하고 적막한 밤의 정막을 돋우어 주는 시계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4시를 친다.

 

<2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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